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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사랑의 실천

  • 영성, 사랑의 실천
웹진 상세 내용
[제139호] “Yes, I do”
  • 구분 | 201901
  • 카테고리 | 영성, 사랑의 실천
  • 작성일 | 2019-01-02
영성, 사랑의 실천 “Yes, I do” 박동춘 성빈센트병원 산부인과 교수

방글라데시는 벵골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남부 아시아의 인도 북동부에 위치하는 이곳은 원래 인도에 속하던 지역이나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할 즈음에 파키스탄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같은 이슬람교를 믿지만 벵골족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핍박을 받아 온 동파키스탄은 1971년 3월 26일 유혈 독립 전쟁을 통해 서파키스탄(지금의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였다고 한다. 몇 세대를 거치며 치른 전쟁 때문이었을까? 방글라데시로 독립된 지 벌써 반세기가 되어 가지만 여기저기 나붙은 선거 유세의 벽보와 산만하고 쉴 새 없이 울리는 경적 소리, 거리의 많은 사람들은 마치 전쟁 직후의 모습 같다. 이들은 어느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일까?

봉사는 내게 있어 용기가 필요했다. 대부분의 날들을 집과 병원을 쳇바퀴 돌듯 살아온 내게는 매우 불안한 일탈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지저분하고 거친 사람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라는 주변의 우려 섞인 격려는 더욱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나를 움츠리게 한 것은 의료봉사를 가더라도 별로 해 줄 것이 없으며 그들에겐 일회성 진료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선심과 봉사에 길들여져 그들에겐 독이 될 수도 있다고도 했다.

왜 나는 봉사를 가려고 하는가? 우리 의료가 우월함을 보이려고? 내가 베풀어 주었다는 얕은 만족감을 느껴 보려고? 사람들이 물으면 “세상으로부터 이만큼 받았으니 줄 때도 되었다.”고, “더 늙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가야 할 것 같아 간다.”라고 noblesse oblige인 양 대답하지만 실은 나는 속으로 떨고 있었다.

봉사는 준비가 반이라는 말이 맞다. 얼마나 현지에 빨리 투입되어 적응하고 단 시간에 많은 것을 해내느냐가 중요하다. 우여곡절 끝에 봉사단장이 된 내게 제일 큰 걱정거리는 봉사단원 선별이었다. 우리 봉사단은 어떤 빛깔의 봉사단이 될 것인지 많은 시간 고민하고 조언도 들었다. 그리고 이번 봉사는 수술 봉사로 그방향을 결정하였다. 방글라데시는 분명 열악한 수술 환경일 테니 아날로그 시대에 수련 받은 분들이 더 유의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여러 교수님들께 연락하여 가능한 분을 찾은 끝에 비로소 의료진이 결정되었다. 평균연령 50세…. 사람들은 노친네들 봉사단이라 하고 우리는 어벤저스 올드 보이라 불렀다. 이어 의료진을 도와줄 봉사단원도 구성되었다. 각 분야에서 독립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봉사를 하고자 하는 예쁜 마음을 가진 이들이다. 다음으로의 허들은 모아진 봉사단원 간의 신뢰와 융합이었다. 한 병원에서 근무하지만 만나 보지 못했던 사람들, 피상적으로만 소통하던 사람들이 똘똘 뭉쳐야 했다. 상견례를 했지만 서로 서먹서먹하여 눈을 맞추는 것도 어색하다. 각 분야에 단 한 명의 용병뿐인데…. 한 사람이라도 무너지면 우리 봉사는 와해될 것이라는 조바심이 났다.



방글라데시는 생각보다 먼 곳이다. 직항이 없는 탓에 이동에만 대략 하루가 필요하다. 이른 새벽 다카공항에 도착하여 처음 마주한 것은 마치 안개 낀 것으로 착각할 만한 자욱한 매연이었다. 한국의 미세 먼지 걱정은 사치구나 싶을 정도의 공해는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꺼내 쓰게 했다. 이곳이 좋아 이곳에서 살면서 선교를 하시는 요세피나 수녀님이 마중 오셨다. 다카공항에서 수녀원까지는 대여섯 시간, 우리를 위해 달려오셨을 수녀님을 뵈니 왠지 뭉클하였다. 캄캄한 새벽에 유난히 희게 보이는, 챙겨 쓴 마스크가 머쓱하다.

새벽에 도착한 수녀원은 너무나 깔끔했고 우리를 위한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환하게 맞아 주시던 효주 수녀님이 숙소를 안내해 주셨는데 모기장이 드리워진 숙소는 이국적이었다. 당일 일정을 위해 봉사단은 일단 잠부터 자 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네 시간 정도 눈을 붙였지만 누구 하나 잘 자고 난 얼굴은 아니다. 한밤중에도 영락없이 빵빵대는 경적은 길 위에서 자고 있는 듯했고 민방위 훈련과 같은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는 전쟁이 났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각 분야의 봉사단원들은 방글라데시에 미니 빈센트병원 만들기나 하는 듯 준비해 온 수하물을 정리하느라 오전 내 분주히 움직였다. 점심때부턴 바로 진료를 시작할 셈이었다. 4~5일은 걸어 진료를 보고자 힘겹게 온 많은 환자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의 애타는 눈빛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재촉했다.

통하지 않는 언어, 고장이 난 장비들, 부족한 수술 기구….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10명의 봉사단이 모은 마음엔 장애가 되지 못했다. 우린 가지고 있는 지식, 기술을 모두 쏟아 부었다. 나는 매일 밤 마지막 수술이 종료되면 그날의 수술 종료를 카톡을 통해 선언했다. 이는 함께한 하루의 고마움과 많은 응원, 그리고 무사히 끝낸 수술에 대한 감사의 기도와 같다. 퉁퉁 부은 다리와 어기적어기적 걷게 하는 관절, 뻣뻣한 목덜미…. 우린 둘째 날부터는 잘 때 경적 소리나 새벽의 기도 사이렌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곤함이 주는 배려이다.

수술 대상자의 연령은 매우 다양하다. 환경이 나빠 종양이 많았고 덥고 습한 날씨 때문에 음식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름을 그득 넣어 튀겨 먹기 때문인지 고지혈증은 기본이었다. 특히 이슬람문화는 여성에겐 매우 폐쇄적이라 의사를 만나기도 어려운 환경인데 여의사를 만나기는 더욱 힘들어, 대부분의 여성 환자들은 평생 산부인과 진료를 받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우린 가동 인력을 총동원하며 가능한 한 많은 수술을 해냈다. 말도 통하지 않은 먼 나라의 의사, 그것도 잠깐 만난 의사를 믿고 수술대에 눕는 그들의 무한 신뢰에 가슴이 먹먹했다. 누구 하나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소리 없이 늘 ‘기꺼이’다. 둘째 날부터는 수술 후의 환자로 병실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병실을 모두 채워 병상이 부족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현지의 특성상 환자와 함께 다수의 가족들이 같이 내원하기 때문에 병실은 야전병원이나 피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하였다. ‘한국의 DRG를 도입해야 하나? 환자만 오면 되지 왜 가족까지 함께 데리고 오나?’ 하는 나의 짧은 생각은 곧 나를 반성하게 했다. 4~5일을 걸어서 오기 때문에 환자 혼자 올 수도, 아이들이나 노부모를 남겨 두고 올 수도 없기 때문인 것이다. 게다가 평소 굶주린 이들에겐 입원하면 주는 배식도 절실했으리라.

동물이나 사람이나 같은 물을 먹고 같은 물에 씻고, 때가 꾀죄죄한 맨손으로 밥을 조물조물 주무르다 먹으며 담낭 절제 수술을 하려면 집 한 채를 팔아야 한다는 이곳. 주민등록조차 없어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지 알 수 없는 이 나라는 도대체 어디부터 바뀌어야 잘살게 될까? 나는 가당치도 않게 진료실에 음악을 틀어 놓을 요량으로 앰프를 가져가 틀어 놓았다. 이 세상에는 좋은 환경도 있다는, 그런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맘이 이들의 마음속에서 생겨나기를 기대하면서.

모두가 조금씩 초췌해질 무렵, 우린 돌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이동 때마다 머릿수를 세던 나의 일과는 인천공항에 들어서면서 마무리되었다. 사고 나지 말고 아프지도 말고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게 기도해 주신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이다. 그리고 나는 내 나라가 멋진 곳이었음을 새삼 느끼고 감사했다. 내일이면 다시 전쟁과 같은 삶이 시작되더라도.

이번 봉사로 난 좀 더 삶에 대해 겸손해진 것 같다. 늘 부족하다 욕심내지만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나의 간단한 일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허락된 시간인지….

아직도 자꾸 혀끝에 맴도는 말. “베타, 베타콜론?”(방글라데시 말, 아프십니까?)

방글라데시 수술실의 폴대엔 “Yes, I do”라 쓰여 있는 조그만 하트 모양의 마스코트가 걸려 있다. 누군가 같은 마음으로 걸어 두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