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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호] “첫 마음, 첫 자리”
  • 구분 | 201907
  • 카테고리 | 여는글
  • 작성일 | 2019-07-02
여는글 “첫 마음, 첫 자리” 최진욱 시몬 신부 여의도성모병원 영성부장



시간이 흘러도 오랫동안 기억나는 사람, 사건들이 있습니다.

특히, 과거의 일이 현재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을 때, 그 기억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2008년 8월 말, 수도회의 관구장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혹시, 병원 사목을 할 마음이 있냐고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머뭇거리고 있는데, 관구장님께서 내일까지 답을 달라고 하셨지요.

제 방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첫 서원 예식 때 받은 것이고, 못 박힌 예수님의 발아래에 수도회의 사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수도회’… 제가 몸담고 있 는 ‘수도회’의 이름을 떠올렸고, 곧바로 마음의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며 살아가는 고난회원으로서, 고통 의 현장이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에 머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병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9월 1일, 청량리에 있는 성바오로병원으로 첫 출근을 하였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병원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각 병동과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이었지요.

병원 전체를 방문하고 나서, 원목실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사용할 책상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봉사자가 쓰던 책상을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방금 전까지 둘러보았던 병원의 모습, 그중에서도 병실에서 만난 환우들과 가족, 간병인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지요. ‘그럼 앞으로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책상 서랍을 열어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미술 봉사자가 사용하고 있던 그 책상의 서랍 안에는 다양한 필기구, 크레파스, 물감 등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첫 번째 서랍 안에는 엽서가 하나 있었지요.

그 엽서를 꺼내 보는 순간에, 제 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습니다.

흑백의 엽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제5처,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지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나의 이름이 곧 시몬임을 깨닫게 해 주소서!”

그 문구를 통해서, 원목 사제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우들과 그 가족들이 짊어진 십자가를 곁에서 함께 거들어 주는 것.

“예수님의 고난을기억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며 살아가는 고난회원으로서, 고통의 현장이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에 머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이 ‘시몬’임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것이라는 것을….

세례명 시몬은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원목실의 제 책상에는 10년 전의 그 엽서가 놓여 있고, 매일 그 문구를 보면서, 병원에 출근했던 첫날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리고 환우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기 전에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 다른 사람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는 ‘시몬’이 되자고요. “항상 첫 마음, 그 첫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