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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사랑의 실천

  • 영성, 사랑의 실천
웹진 상세 내용
뉴 노멀=‘더’ 노멀
  • 구분 | 202103
  • 카테고리 | 영성, 사랑의 실천
  • 작성일 | 2021-03-04
뉴 노멀=‘더’ 노멀


뉴 노멀=‘더’ 노멀


경험하지 못한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참으로 나 자신이 나약한 인간이며,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날숨이며 들숨임을 고백하게 한다.

COVID-19, 코로나19, 팬데믹, 사회적 거리, 비대면, 백신 내셔널리즘 등의 생경한 단어들이 우리 삶에 어느덧 익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이 제한되고, 미사를 통해 당연하게 접했던 환한 평화의 인사가 그리워진다.

예상치 못한 환경의 변화는 몸담고 있는 의료 사회복지에도 변화를 요구하였다. 취약 계층 의료비 지원, 찾아가는 이동 진료, 지역 사회와의 만남, 교직원과의 협업 등 많은 부분이 대면 관계 중심이었다면, 점차 비대면이라는 뉴 노멀의 규범과 기준이 새로운 일반화의 과정을 거쳐 정제된 노멀로 자리를 옮겨 가며 우리만의 공동체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시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노멀을 만들어 가는 우리의 기준은 ‘더’이다.

여의도성모병원의 의료 사회복지는 그 ‘더’를 인식하며, 가슴에 품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고민이라는 친구를 늘 하느님 앞에 데리고 온다.

매일 아침 사무실이 위치한 5층에 도착하면 성당에서 24시간 1초의 빈틈도 없이 나와 우리, 그리고 우리의 병원을 보호해 주시는 주님, 그분 앞에서 나의 작은 기도를 올린다.

하느님, 아버지,
오늘도 무사히 당신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의 사랑을 담아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주시어, 저의 일이 아닌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것을 저를 통해 하십시오.
제가 당신이 일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겸손을 사랑하게 하시며, 행여, 저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하고자 하면 그 모든 것을 막아 주십시오.
당신의 병원, 당신의 모든 교직원들을 코로나로부터 보호하시고, 지침 없이 서로를 지지하며 두려움 없이 환자를 사랑하게 하소서. 이 순간, 저희의 존재를 몰라 의료비가 없어 죽어 가는 이들이 없게 하시고,
저희가 찾지 못하는 가난한 모든 형제들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저희를 찾아오게 하소서.
또한 저희를 신뢰하며 지원해 주는 많은 기부자들과 은인들을 축복하시고,
당신께서 그들에게 갚음을 허락하소서.
주님, 오늘 ‘더 가난한 이들’, ‘더 도움이 필요한 모든 형제들’에게 당신이 사랑이심을 ‘더 많이 알리도록’ 저와 우리 모두를 축복해 주소서.
아멘.


이렇게 매일을 시작하며, 늘 고민의 첫 자리는 ‘더’를 찾기 위해서 시작된다.


가난한 형제들 중에서 누가 ‘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가?…

실제 코로나19로 취약 계층의 병원 내원 숫자는 감소하였다. 그러나 수의 감소가 질병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병원을 올 수 없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나, 코로나19는 그 도움을 제공할 이웃을 멀리하게 하였고, 사각지대 이주 산모들 역시 병원까지 오는 과정이 바이러스라는 걸림돌로 힘겨운 걸음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가 초래한 많은 어려움과 직접적인 만남의 제약에도 지역사회와 사회적 대화라는 소통과 연대는 취약 계층의 의료 혜택 접근을 강화하며 뉴 노멀 공동체의 통로로 자리하게 하였다.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은 지역사회 공동체 연대는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 번째 회칙인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지닌 주님에 대한 충실성은 그분의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에 비례하는 것이었고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세계적인 고통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한 배에 탄 세계 공동체라는 감각을 순간적으로 되살려 놓았습니다. … 이는 우리 모두가 경험해야 하는 형제로서의 소속감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소속감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가치와 정신이 뚜렷할 때 더 절실해진다. 나의 소명, 우리의 소명은 너무도 뚜렷하게 병들고 가난한 모든 형제에 대한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체현하여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데 있으며,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환자들도 따뜻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쓴다”(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 중에서).

“형제애를 구축하는 과정은 그것이 지역적인 것이든 보편적인 것이든 진정한 만남에 자유롭고 열려 있는 정신들만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50항).

어려운 형제를 향한 복음의 향기가 넘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 우리의 주인이시고 일할 밭을 내어 주신 주님께 사랑이라는 숭고한 노동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의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며 한 가족이 되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우리’면 좋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을 입은 우리는 생명을 잇고, 세상을 연결하는 연민과 존엄을 품은 이들의 자리에 서고자 한다. 그 자리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들려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길에 쓰러진 피투성이의 낯선 형제에게 나의 몸을 굽히고 여관 주인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부탁의 말도 잊지 않고 싶다.

그리고 “주님, 제가 자신의 일을 보려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나려는 마음이 들 때, 쓰러진 그 형제의 얼굴에서 당신을 꼭 알아뵙는 은총을 주소서.”라고 나의 나약함을 내어 맡긴다.


뉴 노멀… ‘더’ 노멀…

“우리가 마주하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삶은 만남의 예술입니다(Life, for all its confrontations, is the art of encounter)”(모든 형제들, 215항). 우리가 공유하고 사용하는 뉴 노멀의 플랫폼에 가난한 형제들이 함께할 수 없어도 더 이상 그들은 이름 없고, 얼굴 없는 누군가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더 쉽게, 더 눈에 보이는 만남의 예술을 일깨우는 형제요, 선물이다.

누가 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가?

더 형제적이고 공동체적인 방법으로 실천하기 위해 오늘도 마음에 물음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