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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사랑의 실천

  • 영성, 사랑의 실천
웹진 상세 내용
혼돈 속에 깨닫게 되는 존재의 소중함
  • 구분 | 202104
  • 카테고리 | 영성, 사랑의 실천
  • 작성일 | 2021-03-30
혼돈 속에 깨닫게 되는 존재의 소중함


혼돈 속에 깨닫게 되는 존재의 소중함


2021년도 어느덧 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세계는 코로나19의 공포에 몰아넣어졌습니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부재에 닥쳐서야 곧 그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는 법이라지요. 이전까지는 너무도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일상들이 한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까이할 수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네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2020년 대구가 공포에 휩싸였을 때였습니다. 의료진 모집이 있었습니다. 저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자격으로 그들을 돌볼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례없는 이 팬데믹의 혼돈 앞에 어떤 의로운 사람들이 앞설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타인을 돌보고자 나섰지요. 저는 그분들의 이타심에 한순간이나마 걱정했던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저의 순번이 되기 전에, 다행스럽게도 여러 사람들의 노력 끝에 대구의 코로나 상황이 안정권에 들어섰고, 곧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인력 지원에 대한 감사와 또다시 이런 상황이 온다면 의료 지원을 하시겠냐는 설문 내용이었지요. 저는 기꺼이 지원하겠다는 대답으로 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즈음에 안타깝게도 우리 병원에서도 3월 마지막 날, 첫 번째로 확진자가 발생했고 저는 바로 병동으로 들어가서 확진자들을 돌보는 간호를 시작했습니다. 발생한 환자를 음압 텐트에 모시고, 국가 지정 병원으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지요.

저는 차라리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닥쳐와 이겨 내야 할 시련이라면, 내가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로 작게나마 보탬이 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또, 그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고 감사함이었습니다.

물론 익히 예상했듯이, 쉬운 일은 절대 아니었지요. 매 순간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코로나 감염 초기 시절에 만연했던 미지와 불확실함에 대한 공포는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좁은 음압 텐트 안에 구속된 채 대기하는 확진자의 패닉에 찬 고성, 그리고 거칠게 내뿜는 확진자의 입김에 맞춰 희뿌옇게 김이 서려 주위를 분간할 수 없게 되는 텐트의 창…. 그를 간호하다가 한밤중이라도 환자를 모시고 지정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서둘러야 할 때, 구급차 밖의 온 사방은 거짓말처럼 어둠과 적막에 뒤덮여 고요한데, 타고 가는 이 차량 안은 새된 소리로 고성을 내지르다가 이내 애원하고 흐느끼는 확진자와 나뿐이니…. 어르고 달래 가며 1시간 넘게 국가 지정 병원으로 이송해 갈 때, 기껏 도착한 병원에서는 무작정 대기하라고만 지시하고 문조차 열지 못하게 하며 수십 분을 대기시키니… 그 모든 초조함과 긴박감은 정말 말 그대로 시험이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그렇게 우리 병원이 겪은 사태가 종식되고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지만, 2020년 12월, 이번에는 경기도가 코로나 환자 대유행에 직면하게 되어 의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다른 곳에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사실을 간과한 제게 내리신 경종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수녀로서, 특히 간호수녀로서 ‘언제나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자. 그 어떤 때, 환자를 돌보는 데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나부터 시작하자. 내가 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이 하기 바라겠는가?’ 하고 다시금 다짐했습니다.

저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당연히 나아가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2021년 1월 1일 새해 첫날 저는 바로 다른 간호사 선생님 5명과 함께 경기대학교 생활 치료 센터에 파견되었습니다.

도착하고 짐을 숙소에 부려 놓자마자 바로 그날로 투입됐지요. 우리보다 먼저 지원한 인원들과 함께 구성된 3팀으로 나뉘어 3교대 근무 방식으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이라고 보기도 민망할 정도로 부족한 고작 1시간의 설명을 듣고선 바로 옆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면서 일단 물어 가면서 시작했습니다. 각 팀 3명당 150에서 200명 이상의 환자를 담당해야 했지요. 우리는 비대면 상태로 확진자가 생활 치료 센터에 입소하면 바로 활력 징후를 측정할 수 있는 어플을 준비시키고 환자의 기저 질환과 약물 복용 여부를 물어 상태를 점검하고는 생활 치료 센터로 안내해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렇게 환자가 하루에 2번 활력 징후를 측정해 두면 비정상적인 결과를 보낸 환자들의 상태를 묻고 약을 처방받아 올려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와중에 또 우리 어린 선생님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치료 중이던 환자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 상급 병원으로 이송해야 하는 경우는 수시로 발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지원자 선생님들보다 먼저 우리 선생님들이 앞장서서 보호복을 입고 무거운 산소통을 끌고서 나섰지요. 그리고 확진자 숙소로 올라가 간호하다가 열성적으로 환자를 이송하는 모습에서 그 작고 여린 모습들로는 품고 있으리라 짐작하기 어려운 크고 아름다운 희생을 보았습니다.

생활 치료 센터에서 지내면서 한번은 제가 수녀라는 것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기쁜 일이 있었어요.

입소한 확진자들은 생활 치료 센터에 들어올 때 최소한의 옷가지와 물품들을 가지고 들어오고 그 외의 모든 생활용품은 치료 센터에서 지원받으며 지내게 되는데요, 퇴소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퇴소 때 입고 갈 의복과 신발 등을 외부의 보호자로부터 택배로 받아 다 갈아입고 퇴소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환자분이 혼자서 사시다 보니 의복을 택배로 보내 주실 가족이 없다고 하소연하시는 딱한 처지에 놓이셨어요. 경기도청 직원이 그 사정을 파악해서 “환자 중에 가족이 없어서 옷과 신발을 보내 줄 사람이 없다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전하시면서 저도 그 사정을 알게 되었지요.

저는 당연히 된다고 했습니다. 아마 경기도청 직원분도 제가 수녀라는 점에서 무언가 딱한 분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리라고 짐작해서 물었던 거겠죠. 천만다행으로 제가 들어 드릴 방법이 있었어요. 제가 남을 돕기 위해서 조력을 요청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돕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부탁해서 들여오는 방법으로 해결했지요. 바로 며칠 후 그 친구가 보내 준 의복과 신발로 환자분은 무사히 퇴소하였습니다.

슬프게도 얼마 전에 바로 그 친구가 갑작스럽게 사고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요즘 천사 하나를 잃었다는 슬픔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이치라지만 그 친구 덕에 가능했던 선행들을 떠올리니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봉사하길 마다 않고,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던 내 친구 잔다르크가 부디 영원한 안식에 이르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되돌아보면, 나는 대단한 일도, 그렇다고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선뜻 나서기 어렵다면 작은 한 걸음이나마 나부터 내디뎌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일 잘하고 희생정신도 봉사 정신도 투철한 다른 많은 지원자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개중에 운 좋게 뽑혔던 내가 이렇게 말할 기회를 받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