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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0호] 이유가 있지 않을까?
  • 구분 | 202108
  • 카테고리 | 여는글
  • 작성일 | 2021-07-30
이유가 있지 않을까?

전민배 미카엘 신부 동성중학교 교장

누구나 학창 시절 자신이 머물렀던 교실을 떠올려 보면, 아련한 추억의 파편들 저편에 기억에 남는 급훈이 있을 것입니다. 때론 형식적이고 따분하게 보이는 급훈이 있는가 하면, 이따금 재미있고 창의적인 급훈이어서 졸업 후 성인이 되어서도 생각나는 급훈도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깨면 병아리, 남이 깨면 후라이”
‘병아리’는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의 꿈을 향해 새롭게 태어난 학생들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반면에 계란 ‘후라이’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입맛에 맞도록 잘 길들여진 학생들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어떤 학생들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마치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위해 공부를 해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투정을 부리곤 합니다. 아직 미완의 시기임을 감안하더라도 학생들이 스스로 깨달아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태어나고 변화되기를 바라는 담임 선생님의 간절한 마음이 급훈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난달 중학교 교장 협의회가 있어서 근처 중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학교별 현안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휴식 시간에 방문한 중학교를 둘러보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어느 교실 복도를 무심코 지나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교실에 걸려 있는 액자 속 글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 반의 급훈이 적혀 있었습니다. [급훈: 이유가 있지 않을까?]

급훈치고는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학생 두 명과 마주보고 정겹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잰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다른 교장님들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귀가한 이후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사실 교내에서 발생하는 학생들의 갈등과 다툼은 많은 경우 다른 친구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성급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인 직장에서의 갈등과 분쟁이 촉발되는 이유도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마주하는 동료가 저렇게 얘기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주는 것이야말로 존중과 배려이고 인간관계를 이어 주는 소통의 창구입니다.

일전에 학교에서 늘 얼굴을 찌푸리고 인상을 쓰고 다니는 삐딱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등교할 때도 수업 시간에도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 학생은 상대방을 피하듯이 고개를 숙이거나 미간을 찌푸리곤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고 야단을 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학생과 꾸준히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대화를 시도하고 신뢰를 쌓아 가던 교목 신부님께서 드디어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안경 때문이었습니다. 축구하다가 안경이 깨졌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학생이 부모님께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분의 다른 안경은 도수가 맞지 않아서 선생님의 판서 내용을 또렷하게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 인상이 험악한 학생으로 낙인 찍혀 버렸던 것입니다. 안경을 써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안경 없이 칠판 글자를 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진다는 사실을!

삐딱한 학생의 비밀스러운 이유가 밝혀졌고, 교목실에서 비용을 무상으로 지원해 도수에 맞는 안경을 그 학생에게 선사해 주었습니다. 물론 찌푸렸던 인상이 펴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반항기 많은 학생이라고 소문난 학생은 안경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천천히 다시 보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교사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고 소중한 깨달음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학교에서 사고치는 학생들을 마주할 때 잠시 멈춰 ‘이유가 있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눔으로써 우리 교육 공동체와 의료 공동체가 ‘함께 소중한 우리’로 나아가는 조그마한 원동력으로 이어지기를 바라 봅니다.

“‘지금 당장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마주하는 동료가 저렇게 얘기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주는 것이야말로 존중과 배려이고 인간관계를 이어 주는 소통의 창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