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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사랑의 실천

  • 영성, 사랑의 실천
웹진 상세 내용
[제175호] 마음이 하는 일
  • 구분 | 202201
  • 카테고리 | 영성, 사랑의 실천
  • 작성일 | 2022-01-04
마음이 하는 일 / 김은영 수녀 부천성모병원 사회사업팀장




2021년 7월 온 종일 장맛비가 무섭게 내리던 날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한 청년이 들어옵니다. 동남아시아계 남성은 작은 비닐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무섭게 내린 비에 많이 젖어 있었고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함께 있던 부서원들 모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수건을 건네고 자리를 안내하면서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 청년은 서툰 한국어를 어렵게 말합니다.
“도와주세요…. 아기 태어나요.”
통역 서비스까지 동원해 어렵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개인 병원에서 아기를 낳던 아내가 위험한 상황이 되어 응급실에 와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부부는 베트남 국적으로 각각 취업 비자와 결혼 비자로 한국에 입국했지만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미등록 불법체류 신분으로 제조 공장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여러 차례 실패 끝에 어렵게 임신되었으나 기쁨도 잠시, 산모는 임신과 함께 A형간염 진단을 받았고, 출산을 앞두고 간 수치가 상승되어 자칫 태아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매우 좋지 않은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부부의 사연을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현실로 다가올 복잡한 문제들이 머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국제 수가로 적용될 병원비, 미등록 불법체류 신분으로 제한된 외부 후원 연계 등….
그 속에서 더욱 힘겨웠던 것은 머리를 가득 메운 생각들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저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 우리 병원 응급실이어야 했는지… 한국에서 지내 온 시간 동안 자신들의 아이를 위한 준비는 왜 하지 못했는지… 수년간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제가 가진 수많은 가치 기준의 판단 안에서 마음 한구석 울림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산모는 여아 쌍둥이를 출산하였지만 중환자실에서 하루하루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수많은 검사와 시술을 받아야 했고 태어난 쌍둥이 역시 심한 황달 증상으로 각각 중환자실 치료를 수일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치료 과정의 모든 비용은 비급여 국제 수가로 적용되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백만 원씩 치솟는 병원비와 마주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제 수가로 적용되는 미등록 외국인의 경우 상담 과정에서 공공 의료기관을 안내하거나 간혹 신문 기사 게재를 통해 후원을 받아 보기도 하지만 고위험 상황으로 응급실로 온 부부에게는 이마저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넘긴 산모가 안정을 찾을 무렵 병실을 찾았습니다. 산모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힘겨운 타국살이를 하면서도 부부는 아이를 기다렸고 임신 초기 부터 어려운 상황임을 알았지만 기적처럼 와 준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가 없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라며 서툰 표현을 하는 부부는 아이를 안고 세상 가장 큰 행복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아이들과 함께할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고 도움을 받은 만큼 건강한 가정을 이룰 것을 거듭 약속했습니다.

그 순간 머리를 가득 메웠던 생각들이 하나씩하나씩 마음에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부부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동안의 걱정과 고민의 생각들이 마음 가득한 찬미와 기쁨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막연했던 현실의 문제들도 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수천만 원에 이르는 병원비는 수가 조정 후 의료원 기금의 도움과 원내 자선, 이주민 감면 코드 적용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 있었고, 어렵게 연계된 기관의 도움으로 퇴원 후 산모와 아기들에게 필요한 물품 지원 및 생계비 지원까지 받을 수 있게 되어 쌍둥이 아기를 양육해야 하는 부부에게 큰 힘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던 아기 아빠는 재취업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보였고, 아기 엄마 역시 도움 받은 만큼 많이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을 다짐하며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동안 취약 계층 산모의 산전 검사비부터 출산, 신생아 치료비 까지 지원하는 프리맘 케어(Pre-mom Care) 사업이 4년간 지속되면서 비슷한 상황의 미등록 불법체류 신분 산모가 의뢰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부천성모병원 프리맘 케어 사업은 생명 존중 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 부천성모병원 교직원 중심 자선단체인 성가자선회의 기금으로 임신 초기부터 출산까지 산전 검사비를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출산 전 검사는 산모와 태아의 건강상태를 주기적으로 점검하여 산모와 태아가 고위험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기에 취약 계층 산모들에게는 꼭 필요한 사업이기도 합니다. 주로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미등록 불법 체류 신분의 산모들이 지역 이주민 센터를 통해 의뢰되는데, 대부분의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수입의 대부분을 본국으로 송금하여 출산을 앞두고 정작 자신들의 건강과 출산 등을 위한 준비에는 소극적인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번 쌍둥이와 산모 케이스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이렇게까지 고위험 상황까지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산전 검사비 지원으로 산모와 태아가 좀 더 안정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마 산모와 쌍둥이는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였고 병원 주변에 거주하면서 아기들의 건강관리도 주기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퇴원하는 날 엄마 아빠 품에 안겨 평화로이 잠든 쌍둥이의 모습을 보면서 부서원들 모두 마음 가득 벅찬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소중한 생명을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의 깊고 크신 사랑의 마음이 우리 각자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사업팀 문을 두드리는 많은 환자, 보호자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문제는 의료비 지원입니다. 환자를 상담하면서 국가 제도, 외부 후원 연계 등 마음보다는 머리가 먼저 활동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수백, 수천만 원의 병원비를 마음만으로는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글을 마무리하며 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전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이 걸렸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머리와 마음이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