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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소중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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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0호] 도전과 패기, 성실과 끈기로 달려온 근속 40년의 주인공들 인생 40년의 열정을 불태우다
  • 구분 | 202206
  • 카테고리 | 함께 소중한 우리
  • 작성일 | 2022-05-30
함께 소중한 우리 도전과 패기, 성실과 끈기로 달려온 근속 40년의 주인공들 인생 40년의 열정을 불태우다

일정 기간의 교육과 취업 준비를 마치고 직장이라는 곳에 첫발을 내딛는 사람이라면 대개 그 첫 직장이 평생직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만약 첫 직장이 그대로 정년퇴직의 장이 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직장인에겐 더없는 로망이 될 것이다. 그만큼 한 직장에서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불태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본인 스스로 중도 하차하기도 하고 때론 직장에서 더는 원하지 않아 본의 아니게 등 떠밀려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한때 몸담았던 직장과 송사를 벌이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그런데 20대의 한창나이에 직장에 들어가 무려 40년 근속이라는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으며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있다.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미생물학교실의 유문간 교수와 해부학교실의 오수자 교수, 그리고 부천성모병원 이혜경 재무팀장이 그들이다. 기자는 영광스럽게도 그들과 만나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낌없이 쏟아 부었을 그들만의 열정과 패기, 그리고 도전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근무 시작, 첫 직장에서 정년퇴직까지

오는 8월에 정년을 앞둔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미생물학교실 유문간 교수는 그야말로 가톨릭의과대학의 터줏대감이다. 가톨릭의과대학 학생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미생물학교실 조교를 시작으로 주임교수와 책임교수에 이르기까지 오직 미생물학교실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한결같이 40년을 걸어왔다.

“제가 1975년에 가톨릭의과대학에 입학해서 1982년에 미생물학교실 조교로 시작했어요. 타 대학에 있는 제 친구들이 몇 페이지에 달하는 이력을 쌓으며 우여곡절을 겪은 것에 비하면 저는 딱 한 줄 이력서로 끝나니 생각도 단순하고 생활 자체가 단순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실제로 주변 환경은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컴퓨터와 프린터의 고급화는 저한테도 어마어마한 변화를 주었죠. 예전에 일일이 제도기로 그려 가며 그래프를 만들고 했었는데 이젠 컴퓨터로 그런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빔 프로젝터의 사용으로 따로 슬라이드를 제작할 필요도 없게 되었어요. 논문 발표 때에도 모든 과정을 온라인으로 편리하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죠. 그런 커다란 변화 가운데서도 저는 그런대로 잘 적응하며 지내 왔다고 생각합니다.”

유문간 교수는 40년 근속에 대해 단순하게 살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짧은 소감을 밝힌다. 하지만 유문간 교수가 건네준 4페이지 분량의 ‘미생물학교실 교실사’를 살펴보면 그가 거듭 단순하다고 말한 그 단순함은 오롯이 미생물학교실의 발전을 위해 교육과 연구만을 하며 살아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유 교수는 60여 년의 미생물학교실의 역사를 20년 기간으로 나누어 설립과 모색, 성숙 단계로 구분하며 그가 동료 교수와 이루었던 40년의 발자취를 ‘모색’과 ‘성숙’이라는 단어로 짧고 굵게 보여 준다. 학생 시절을 포함, 거의 반세기 동안 가톨릭의과대학을 지켰던 유 교수였기에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1980년부터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 해부학교실의 조교로 몸담아 온 오수자 교수는 타 대학에서 미생물학과를 졸업하고 가톨릭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경우이다. 학문에 남녀를 따지는 게 고루한 얘기일 수 있으나 한편으론 여학생으로 평생 학생들을 교육하고 연구할 입장에서 해부학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하다. 오수자 교수 역시 해부학교실에 가 보지 않겠냐는 지도교수의 권유에 많은 갈등도 있었지만, 평소 연구에 대한 갈망 또한 있었기에 마음을 다져 먹고 가톨릭의과대 해부학교실의 조교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오수자 교수
“한 사람의 죽음, 주검 앞에서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 갔어요. 당시 해부학 실습용 사체라는 게 무연고자가 많았거든요. 사체를 보는 순간, 아,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고 이분도 생전에는 분명히 삶에 대해 수많은 고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주어진 삶을 잘 살아야겠다는, 그리고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는 여기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늘이 저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 내라는 뜻을 내려 주신거라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막상 오게 되니까 ‘이게 다 뜻이 있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해부학 실습실에 들어갔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해지더라고요. 한 사람의 죽음, 주검 앞에서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 갔어요. 당시 해부학 실습용 사체라는 게 무연고자가 많았거든요. 사체를 보는 순간, 아,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고 이분도 생전에는 분명히 삶에 대해 수많은 고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주어진 삶을 잘 살아야겠다는, 그리고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는 여기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늘이 저에게 주어진 삶을잘 살아 내라는 뜻을 내려 주신 거라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특히 해부학 실습이 있을 때 드리는 위령미사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존엄을 생각하게 해 주는 그런 시간이어서 정말 좋았어요.”

오수자 교수는 해부학교실에서 인간의 존엄성, 인간 존중에 대해 더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며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오게 된 데는 선배 교수들도 많은 힘이 되었지만, 그때 받은 깨달음이 큰 발판이 되었다고 전한다.

1982년 3월, 당시 부천성모병원의 전신이었던 성가복지병원 원무과에서 첫 업무를 시작한 이혜경 재무팀장은 그렇게 원무과에서 30년, 다시 재무팀에서 10년을 근무하며 오는 10월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다.



“제가 원무과에서 30년을 근무하다가 재무팀에 와서 10년 일하며 팀장을 맡은 지는 3년이라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이제 입사 후 3~4년 차 된 그런 기분입니다. 그런데 근속 40년이 되었다고 하니 제 나름대로 대단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처음 입사 때는 부천성모병원이 성가복지병원이었던 1982년이었는데 직원의 절반 이상이 수녀님들이라 중압감이 엄청나게 컸던 게 기억납니다. 그래서 오히려 실수하지 않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후배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다시 각오를 다지고 또 UM이라는 중간 관리자가 되었을 땐 또 다른 각오로 임하게 되고 재무팀에 와서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니 그에 따른 각오도 달라지고요. 늘 새로운 각오로 일했던 것 같아요. 그게 40년을 근속하게 된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습니다.”

이혜경 재무팀장은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면 누구나 3~4년을 주기로 한 번씩 퇴사나 다른 직업에 대한 로망 같은 걸 꿈꾸는데 그때마다 그거야말로 헛된 허영심이라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활력이 생기면서 새로운 각오로 신입 직원처럼 일할 수 있었다며 웃는다.

어쩌면 40년 근속의 원동력이란 저마다 다른 개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그들만의 내공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멘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근속 40년

“특히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 저는 오히려 동료들이 제일 큰 도움이 되었어요. 결혼하기 전 젊은 시절에는 동료들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땐 종종 야근이란 게 있었는데 밤새워 일해도 힘든 줄 모르고 서로 격려하며 주고받는 얘기들이 마냥 즐겁기만 했죠. 그리고 결혼 후엔 남편과 식구들이 많이 응원해 줬어요. 워킹 맘으로 힘들어할 때도 ‘너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며 늘 위로해 주었고 그 덕분에 견딜 수 있었던 날들이 많았어요.”

부천성모병원 재무팀 이혜경 팀장은 자신의 각오도 각오지만 짧지 않았던 40년이라는 시간을 옆에서 함께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며 회고한다. 혼자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동료와 가족이 있어 비교적 수월하게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이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고 인사를 전한다.



유뮨간 교수
“우리 학교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배경이 있고 학교법인이나 보직 신부님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또 그만큼 가톨릭대학교는 상당히 수준 높은 대학입니다. 전 그 신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가톨릭신학대학의 교과과정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얘기를 많이 해 주셨어요. 의학과 신학의 만남이라고 할까요, 올바른 교육과 경험, 그것을 실천하는 그런 올바른 신부님이 계셨기 때문에 저도 끝까지 남을 수 있었어요.”

이혜경 팀장
“후배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다시 각오를 다지고 또 UM이라는 중간 관리자가 되었을 땐 또 다른 각오로 임하게 되고 재무팀에 와서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니 그에 따른 각오도 달라지고요. 늘 새로운 각오로 일했던것 같아요. 그게 40년을 근속하게 된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시고 다른 대학에 석좌교수로 가 계시지만 학장을 지내셨던 김진 교수님은 여러모로 참 따뜻한 분이셨어요. 천명훈 교수님 같은 경우엔 학문적으로 지지해 주시는 역할을 해 주셨죠. 또 정진웅 교수님은 기본적으로 조교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활의 틀을 잡아 주셨다고 할까요? 어쨌든 이 세 분의 교수님들은 저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셨어요. 물론 다른 교수님들도 저를 따듯하게 대해 주고 많이 가르쳐 주셨지만, 특별히 이 세 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오수자 교수는 해부학교실의 교수나 동료들이 다른 과에 비해 유달리 따뜻하고 서로 존중해 주며 배려가 깊었던 것도 사체를 다루는 일에서 남다른 깨달음을 얻은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마지막 순간엔 다 똑같은데 인간관계를 어렵게 만들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던 것 같다고 덧붙인다. 해부학교실 동료들끼리는 아마 마지막 가시는 분들을 잘 모셨기 때문에 복 받는 거라고 표현한다고도 하니 한 사람의 주검을 대했던 그들의 자세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3년 전에 작고하셨지만, 제 인생의 멘토였던 교수님이 한 분 계셨어요. 다른 대학에서 오신 분인데 저를 정말 좋아해 주시고 저도 그 교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 의지했죠. 저보다 10년 넘는 선배인데 저하고 성격이나 비슷한 부분이 많았고 학문과 교육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얘기도 서로 잘 통했죠. 무엇보다 제가 외롭지 않게 잘 보살펴 주셨어요. 뭐랄까, 품위 있고 생각도 깊으시고 소신도 있으시고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참아라, 할 일도 많은데 왜 자꾸 다른 데 신경 쓰냐며, 제 할 일이나 잘하라고 다독여 주셨죠.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그렇게 7~8년간 함께했는데 다른 대학으로 가신 후에도 개인적으로 계속 교류했죠. 정말이지 보기 드문 분이셨어요.”

유문간 교수는 주변에서 자신을 천연기념물이라고 운운할 정도로 타협할 줄 모르고 오직 교육과 연구 등 학문만 바라보고 직진했던 자신에게 유일한 멘토였던 그가 3년 전 세상을 떠났을 때 너무 슬펐고 다시 외로워졌다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기자는 그런 유문간 교수에게서 문득 예전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남산골딸깍발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특히, 그 글 끝부분에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어쩌면 그렇게 유 교수와 딱 맞아떨어지는지, 그저 이것도기자의 개인 단상일 뿐이다.

이어 유문간 교수는 자신이 가톨릭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에 끝까지 남을 수 있게 도와주었던 또 한 사람이 있었다고 되짚는다. “그분은 신부님이셨는데 제가 한참 힘들 때 그 신부님께서 결정적으로 저를 도와주셨어요. 아시다시피 우리 학교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배경이 있고 학교법인이나 보직 신부님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또 그만큼 가톨릭대학교는 상당히 수준 높은 대학입니다. 전 그 신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가톨릭신학대학의 교과과정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얘기를 많이 해 주셨어요. 의학과 신학의 만남이라고 할까요, 올바른 교육과 경험, 그것을 실천하는 그런 올바른 신부님이 계셨기 때문에 저도 끝까지 남을 수 있었어요.”

도전과 보람, 그 발자취를 기억하며

한 직장에서 40년을 근무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그중 어떤 일에 보람을 느꼈고 뭐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사실 이런 질문은 40년을 근속한 이들에게 참으로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쌓여 한 달, 또 그 한 달이 1년이 되고 그렇게 40년이 되는 동안 그들에게 의미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무엇인들 있을까. 어떤 의미든 낱낱이 기억한다 해도 그것을 담아내기엔 수십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듯싶다. 그런데 구태여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묻는 미욱한 기자에게 성심성의껏 응수해 준다.

오수자 교수는 1년 반 동안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공부하며 석학들 사이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 인정받았던 박사 후 연수 시절이 자신에겐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 후 자신감을 안고 돌아와 연구에 대한 열정을 다잡으며 당뇨병성 망막 합병증에 관련된 연구로 첫 연구비를 따내 지속적인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희열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고 들려주었다.

유문간 교수는 미생물학교실 주임교수와 책임교수를 겸하며 7~8년에 걸쳐 교수와 학생 간 질의응답으로 진행했던 ‘증례 토론식 학습’에 관해 설명하며 대학 교육이 학원의 주입식 교육과 달라야 하는 그 차별성에 대해 역설했다. 요컨대, 감염과 면역의 다양한 증례를 집단 토론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실용적 핵심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이를 위해 한 학년 학생들을 교수당 30명 내외의 소규모 단위로 나누어서 지도했으며, 학습 과정과 내용을 통일하고자 사전에 교수 요원이 수평적으로 이를 공유하고 상호 논의했다. 최근, 유 교수의 퇴임 후에도 그 토론식 교육을 미생물학교실에서 계속 진행하고 싶다는 후배 교수들의 제안과 요청을 듣고 유 교수는 요즘에 와서 더 보람을 느낀다며 웃는다.

이혜경 팀장은 2008년 서울성모병원을 포함해 가톨릭대학교 부속병원들에 본격 가동되었던 ‘CMC nU 시스템’(통합 의료 정보시스템) 프로젝트에 참여해 업무의 틀을 만들었던 일을 언급하며 원무과에서 수기로 시작했던 모든 과정을 시스템화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어서 뿌듯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2009년, 부천성모병원 역사에 전무후무했던 8박 10일의 미국 연수에 선정되어 20명의 동료와 함께한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축복이며 큰 행운이었다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년퇴직 후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오수자 교수는 그동안 못했던 그림도 그리고, 독어와 일어 같은 언어도 더 배우고 싶고,여행도 많이 다니고 싶다고 한다. 독일 연수 때 영어로만 짧게 소통하고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이혜경 팀장은 퇴직 후 새로운 20대를 한번 살아 보는 건 어떨까 하고 계획하고 있다. 20대에 일하느라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하나씩 시도해 본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며 지금부터 막연하게나마 이것저것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유문간 교수는 퇴직 후의 계획은 비밀이라며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끝내 함구한다. 그래서 더욱 궁금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지난 40년을 교육과 연구에 정진해 온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멋진 선물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아울러 때로는 숨통을 조이기도 했을 일터를 벗어나 이제야 비로소 조금은 가벼워졌을 어깨를 펴고 모두가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나아가기를! 그들의 앞길에 알사탕처럼 달콤하고 동화의 결말처럼 행복한 일들만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40년 근속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