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5호] 새로운 시대의 연구자를 기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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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에 앞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는 우리 대학 선후배·동료에게 감사 말씀을 드린다. 대학원을 포함하는 대학의 사명이 진리 탐구와 연구에 있음은 두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리 탐구는 연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의 경우 보편적 사랑과 복음적 헌신이 가톨릭학원의 창학 이념임을 헌장에서 밝히고 있으며 이는 대학의 연구를 통하여 구현된다고 하였다. ‘연구’가 곧 사랑과 헌신을 실현하는 수단임을 천명한 것인데 이것이 내가 우리 대학, 대학원에 새로운 연구자가 많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이다. 우리는 대학에서 학문을 배우고 익힌다. 그리고 그것을 반석으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여 인류의 발전과 평화에 기여한다. 연구자는 여기에 앞장서 세상의 발전을 이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연구자에 대한 화려한 수사와는 대조적으로 ‘연구자는 기약 없는 항해를 떠나는 바보’라는 말도 있다. 자신의 과학적 가정이 옳다는 결심과 기대만을 가지고 기약 없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의 눈에는 영락없는 바보로 비친 것이다. 어쩌면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물론 새 대륙 발견 후의 행적은 논란이 많지만)가 그랬을 것이다.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닿을 수 있다는 자신의 과학적 가정에 근거하여 아무도 가 보지 않은 항해에 나선 그를 사람들은 무모하다거나 바보로 불렀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셈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연구자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훌륭한 연구자는 열정(passion), 인내심(patience), 상응하는 지식, 결단력, 연구 수행 방법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여 자신의 과학적 가정을 입증하려는 열정에 불탔고 항해가 예상보다 길어졌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인내하였다. 해도(海圖)에 관한 그의 탁월한 실력과 항해술은 그의 성공을 담보하는 조건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익숙한 항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을 택한 것이며 이런 과정에서 타인의 인정(approval)이나 불인정(disapproval)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콜럼버스의 길 대신 ‘편안한 연구’를 택하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국가, 공공 기관, 사기업, 대학, 병원 등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은 연구자들이 스폰서의 필요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재직 중인 대학이 요구하는 논문의 양적(논문 수)·질적(논문 인용 지수) 기준 및 기타 조건도 충족시켜야 한다. 양적 평가를 잘 받기 위하여 연구비 취득이 용이한 연구, 기존 연구 결과에 반하지 않는 연구, 알려진 내용을 반복하는 연구 등 의미 없는 논문을 양산함으로써 스스로 ‘연구자의 편향(observational bias)’에 갇히고 만다. (즉 연구자 자신이 예측하는 결과, 주장과 개인 편견에 의해 결정되는 연구 결과를 다량으로 만들어 논문을 씀으로써 ‘편안한 연구’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 대학에서 관찰되고 있으며 개선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Nature가 2014년 발행한 ‘The top 100 papers’라는 짧은 논평에 따르면 1900~2014년 사이 Web of Science에 등재되어 발표된 논문은 총 57,797,978편에 이른다(발표된 논문의 첫 장만 쌓아 놓아도 Kilimanjaro산 높이 5,985미터와 유사하다). 이 중 한 번도 다른 논문에서 인용되지 않은 논문이 25,332,701편이며(43%), 100번 이상 인용된 논문은 1,080,397편(1.86%)에 불과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중 인용률 상위 100편의 논문은 대부분 실험 방법에 대한 연구이며 인류에게 획기적으로 공헌한 연구, 예컨대 노벨상 수상 논문 등은 여기에 거의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연구에 ‘가치가 없는 연구’는 없겠지만 편안한 연구에 대한 지향이 가히 범세계적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래 연재만화는 ‘편안한 연구’에 대한 대학의 분위기와 문제점과 아울러 연구자가 취할 바람직한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Mutt & Jeff, 1942).
순찰 중인 경관이 가로등 아래 구부린 자세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남자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있다고 하여, 경관도 찾는 것을 도왔으나 동전을 찾을 수 없었다. 경관이 남자에게 어디에서 잃었는지를 물으니 남자는 두 블록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한데 왜 여기서 동전을 찾느냐고 다시 물으니 남자가 대답했다. ‘이곳은 밝은 조명이 있으니까요.’
앞선 만화는 과거보다 많은 연구비를 지출하면서도 그 결과는 과거보다 나을 것이 없는 우리나라의 연구 현실에 대한 풍자일 수도 있다. 우리 연구가 여전히 제한적이며 획기적 발견이나 진실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만화 속의 남자처럼 동전(진실)이 있는 어둠을 회피하고 밝은 가로등 아래에서의 ‘편안한 연구’를 선호한 결과일 수 있다. 연구의 어려움과 실패의 위험을 피하고, 연구에 따르는 각종 보상(논문 발행, 연구비 획득, 진급 등)이 안정적으로 보장된 불빛 아래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연구자들은 대체로 겸손하며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다른 연구자와 생산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목표가 분명하고 잘 짜인 연구 계획에 따라 열심히 정진한다. 이들은 편안한 연구 환경을 추구하지 않으며 좋은 글쓰기를 통해 연구 결과를 극대화시키려 노력한다. 연구에 대한 보상은 이러한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보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연구를 함으로써 경제적인 보상을 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최근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 결과로써 직무 발명 보상을 금전적 또는 비금전적으로 받는 경우가 있어 다행이지만 연구 결과에 대한 보상이 연구 자체의 중요성보다 우선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변화의 속도가 눈부시게 빠른 현대사회는 과거와 다른 대학, 즉 ‘연구하는 대학’을 요구한다. 이를 위하여 대학은 유능한 연구자를 지속적으로 발굴하여 연구의 연속성을 유지하여야 하며 연구원들에게는 최적의 연구 환경을 제공하여야 한다. 신참 연구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지속적 대화를 통하여 낯선 환경에 위축되지 않도록 하며 연구 자료에 대한 의견 교환, 논문 작성 지원 등을 통하여 신참들의 연착륙을 도와야 한다. 궁극적으로 대학은 좋은 연구자를 많이 발굴하고 그들이 우수한 결과를 생산할 수 있도록 최적의 연구 환경과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 한편 연구원들은 기존의 학설과 발견을 답습하여 논문을 양산하는 ‘편안한 연구’에 안주하지 말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기약 없는 여정을 기꺼이 떠나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대학은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학과 연구원이 이러한 정신에 입각하여 함께 호흡할 때 “사랑을 통한 생명 존중과 인류에 공헌한다.”는 가톨릭 정신은 활짝 개화(開花)할 것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정말 서 있고 살아 있고 참삶을 살고 있는 이곳뿐이다.”(Martin Buber), 하느님이 선택한 이곳에서 “연구(과학)가 연구자(과학자)에게 생계 수단만 아니라면 경이로울 텐데….”(Albert Einstein)라는 바람이 새로운 연구자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